[궁창] 뱀수인 아처x인간 랜서 썰 - 3(完)
마지막 편입니다. 수위 파트가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주의할 부분은 적다고 생각해 이쪽으로 게시합니다.
다만 주의할 점이라면 전승에서의 쿠 훌린의 아내 및 다른 모브여성들과의 관계가 언급되고, 궁창 2세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뜨자 쿠 훌린은 자신이 침상으로 쓰는 곳에 누워 있었음.
몸은 깨끗이 닦여 있고, 목이며 가슴 등 몸 곳곳에 얼룩져 있던 울혈이며 잇자국 비늘에 긁힌 상처 따위도 희미해져 있었음. 둘러보면 너른 동굴 안엔 자신뿐이었음.
잠깐 잠든 게 아니었나? 얼마나 지난 거지?
침상에서 일어나면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미끄러져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드러났음. 쿠 훌린은 주저하지도 않고 나신인 채로 찌뿌드드한 몸을 풀었음. 허리나 민망한 곳의 통증도 이제는 거의 희미해진 듯했음.
솨르륵, 촤르륵,
이제는 익숙한, 사슬이 부딪는 소리 혹은 철이 돌을 긁는 듯한 소리를 향해 쿠 훌린은 고개를 돌렸음. 물론 아처였음. 양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던 아처가 한쪽 손에 든 것을 던졌고 쿠 훌린은 날아오는 것을 공중에서 잡아챘음.
-몸상태가 괜찮다면 입어 봐라. 안 맞는다면 고쳐야 하니까.
뒤이어 남은 손에 들고 있던 음식 쟁반을 내려놓은 아처가 새삼 내외라도 하듯이 자리를 떴음. 굳이 말은 안 했지만 아처가 가져온 옷은 쿠 훌린이 입던 옷(처음 만나 싸웠던 날 찢어진)을 본떠 새로 만든 옷이었음. 역시나 쿠 훌린은 몰랐겠지만 전부터-떠나보낼 마음의 결단을 내린 뒤부터-준비했던 것들이었고. 그리고 따로 치수를 잰 적도 없으면서 잘 맞겠지. 아처는 눈이 좋고 그 눈으로 늘 쿠 훌린을 보았을 테니까.
옷은 입었고 잘 맞고 그럼 이제 어쩌란 거지, 일단 요기부터 하란 뜻인가. 빠르게 결론을 낸 쿠 훌린은 아처가 두고 간 음식에 손을 뻗었음. 그리고 식사를 마칠 즈음에야 돌아온 아처는 이번에도 빈손이 아니었음. 쿠 훌린이 그러듯이 한 손으로 자루를 잡고 어깨에 걸친 모습으로, 게이볼그를 들고 있었음.
-잘 맞나 보군.
-...!! 내 창...!
붉은 창이 허공을 갈랐음.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마치 제 손안으로 불러온 듯 게이볼그를 잡아챈 쿠 훌린이 씩 웃었음.
-축객이냐?
-사흘 가까이 잤으니 체력은 회복했겠지.
-켁, 진짜 오래 잤네.
대련에 이어진 수차례의 교합으로 피로가 쌓였던지 쿠 훌린은 마지막 사정 끝에 아처의 몸 위에 쓰러져 깊이 잠이 들었음. 아처가 깨우려 해도 짜증내며 돌아누울 뿐이었음. 자기 침상이 아니다 보니 뒤집어쓸 이불도 베개도 없자 쿠 훌린은 벽처럼 또아리를 튼 아처의 몸통 쪽에 얼굴을 묻었음.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실없이 웃음이 났음. 잠든 걸 깨울세라, 아처는 쿠 훌린을 침상으로 안아 옮기거나 씻기러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안고만 있었음.
같은 영력을 공유하고 있기에 아처가 쿠 훌린을 안은 채로 안정을 취하는 것은 그 자체로 회복에 도움이 되었음. 그런 채로 아처는, 이번에도 솜씨 좋게 꼬리로 수건 따위를 가져와 쿠 훌린의 몸을 닦아 주었고 그럼에도 깨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미적미적 쿠 훌린을 침상으로 옮겨다 주었음.
그런 뒤에는 이미 며칠 전에도 손질해 뒀던 게이볼그를 또 손보러 가고 만들어 둔 옷 괜히 한 번 더 확인하러 가고 쿠 훌린이 일어나면 먹을 것을 만들고... 그러다가도 쿠 훌린의 곁으로 와 깨었는지, 혹은 상태가 괜찮은지를 확인했음.
n번째로 여전히 잘 자고 있는 쿠 훌린을 두고 돌아서던 아처는 문득 한동안 살펴보지 않았던 알에 생각이 미쳤음. 그래봐야 며칠 정도였고 물론 알에 이상이 생겼다면 아처가 몰랐을 리가 없지만 전에는 매일같이 들여다보곤 했으니까.
분명, 처음에는 그쪽이 목적이었는데.
자조 섞인 쓴웃음과 함께 아처는 알을 두었던 곳으로 올라갔음. 물론 야속한 부친들이 없이도 알은 여전히 아주 건강했음. 하얗고 단단한 알껍데기 표면에 난 가는 금 사이로 좁은 알 속을 벗어나 마악 활개를 펴려는 생명력이 새어나오고 있었음. 아처는 말을 잇지 못했음. 알을 품에 안고 입맞추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고 기뻤지만 그러다 실수로 금까지 가 있는 알을 깨뜨리지나 않을까 두려워 겨우 참았음.
알에 손을 대지도 기뻐 웃거나 감격해 울지도 못한 채, 아처는 기쁨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굴었음. 알의 안과 표면에서 영력이 맥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알을 더 깨기에는 역부족인 듯했음. 아처는 그런 제 아이를 응원하듯, 알과 대치하듯 마주하고 있었음. 불에 올려두었던 쿠 훌린의 식사에서 타는 냄새가 날 때에야 아처는 허겁지겁 알 곁을 떠나 불가로 돌아갔음. 태운 음식과 그릇 등을 수습하고 다시 요리를 하고 난 뒤에야 쿠 훌린은 잠에서 깨었고 지금에 이르렀음.
-드디어 내게 목숨을 내놓을 마음이 섰나?
손안의 창을 이리저리 휘두르던 쿠 훌린이 아처의 목에 창끝을 겨누었음
-할 수 있다면 뜻대로.
-재미없는 새끼.
눈썹 하나 까딱 않는 아처를 보며 쿠 훌린이 혀를 찼음. 붉은 창이 거두어졌음
-그래. 그럼.
쿠 훌린이 자리에서 일어났음
-결계는 해제해 두었으니 그대로 나가면 된다.
-어엉.
쿠 훌린이 아처의 옆을 지나쳐갔음. 돌아보기도 붙잡기도 작별인사를 하기도 모호한 사이. 하물며 둘 사이에 태어난 알이 부화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아처는 말없이 지금까지 쿠 훌린의 침상 및 그 주변의 주된 생활공간(방이라 부르기에는 공간 구분이 되어 있진 않았으니까)을 정리하기 시작했음. 태어날 아이를 위한 공간으로 꾸밀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신생아일 때는 자기가 끼고 살아야 할 테니까-
...아이를 보러 갈까. 혹시 지금쯤은 나왔을까. 껍질을 더 깨지 않았을까. 아처는 느린 손을 멈추고 알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음.
탁, 타닥,
알껍데기가 조각나 떨어져 나간 틈으로, 단풍잎보다도 작은 낙엽빛 손이 인사를 건네듯 나와 있었음
**
얼스터의 가장 날카로운 창이자 방패인 쿠 훌린이 돌아왔음. 물론 곧 다시 모험이나 전투에 뛰어들었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품기도 예사였지만 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음. 쿠 훌린은 제가 안은 여인이 아이를 가지면 뜻을 물어 여인과 자식을 함께 거두거나, 원치 않는 이에게도 비호와 후원을 약속하게 되었음.
또한 직전에 다녀온, 일 년이 넘게 걸렸던 기나긴 모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 무엇을 보았고 겪었는지. 모든 것이 비밀에 부쳐진 모험은 다른 무수한 모험담과 무용담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고 이것들에 대해서는 쿠 훌린 역시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해 주었음.
세월이 흐르고 패배할 것 같지 않고 죽지 않을 것 같았던 빛의 왕자에게도 마지막이 찾아왔음. 그의 승리와 무용은 그만큼의 원한과 복수심 위에 쌓인 것이었고 쿠 훌린에게 패배한 자들, 친지를 잃은 자들, 그를 증오하는 자들은 코노트의 여왕 메이브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음. 목숨 같은 기어스를 꺾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거듭되며 위대한 영웅은 약해져 갔고, 마침내는 적에게 던졌던 게이볼그를 적이 붙잡아 되던진 것에 몸을 꿰뚫렸음. 반신마저 절명할 부상을 입었음에도 쿠 훌린은 무너지지 않았음. 피를 많이 흘려 눈앞이 흐리고 다리가 꺾였지만 피는 전에도 많이 흘려 봤고, 보는 눈이 몇인데 꼴사납게 무릎 꿇거나 나자빠져 뒈질 수야 있겠어.
피가 울컥 올라오는 입으로 쿠 훌린이 사납게 웃었음.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흉흉한 기세에 잡병들은 감히 그를 범접치 못했고 난다 긴다 하는 전사들마저 순간 주춤한 틈을 타 쿠 훌린은 그들 사이를 지나쳤음. 몸에 꿰인 창을 언제라도 뽑아 휘두를 수 있다는 듯 창자루를 잡은 채, 온몸을 적과 자신의 피로 물들인 쿠 훌린이 전장의 폐허 속에 가까스로 무너지지 않고 비죽이 서 잇던 기둥에 다다랐음. 그 기둥에 기대어, 무너지지 않도록 제 몸을 기둥과 묶어 매듭을 거듭 조이던 손은 피에 젖어 자꾸만 미끄러지고 떨리며 헛돌았음.
가까스로 매듭을 지은 그 손이 툭, 떨어졌음.
동시에,
콰르르르르릉!!
천지가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지면이 내려앉았음. 갈라진 땅이 적의 군마를 집어삼켰고 치솟았던 흙과 바위는 화살처럼 소낙비처럼 쏟아졌음. 말울음과 인간의 단말마, 피와 살점과 흙이 튀는 아비규환 속에 피처럼 붉은 잔상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피보다도 붉디붉고 거대한 뱀이 모습을 드러냈음. 죽은 자의 단말마가 스러진 자리를 산 자가 내지르는 공포의 비명이 가득 채웠음.
뱀 때문에 생긴 지진은 가라앉았어도 그 혼란과 공포는 수습되지 않았고 그 틈을 타 뱀은 코노트 연합군 진영을 뒤집어엎었음. 그저 그 육중한 몸으로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적들의 시신이 쌓여 갔음. 강철 같은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몸에는 공격이 무의미했고 마술 또한 효력이 없었음.
놀랍도록 짧은 학살의 시간이 지나고 남은 것은 죽은 적군과 아군, 살아남고서도 두려움과 당황으로 어쩔 줄을 몰라 굳어 있는 얼스터의 전사들뿐이었음. 붉은 뱀이 거대한 머리를 얼스터의 성벽 쪽으로 돌렸음. 피가 식을 듯 차가운 은빛 시선에 성벽 안의 사람들은 까무라치거나 얼어붙었음.
붉은 뱀의 머리가 신기루처럼 일렁이는가 싶더니, 머리가 있던 자리에 인간의 상반신이 나타났음. 뱀의 비늘처럼 붉은 옷을 입고, 품에는 쿠 훌린을 안아든 모습으로. 뱀의 거동을 지켜보던 이들이 숨을 삼켰음. 두려움을 가까스로 떨치고 거대한 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던 콘코바르 왕마저도 이 광경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음.
[무용한 감사를 표할 것이라면 물러나라. 어리석은 인간의 왕.]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묵직한 목소리였음. 붉은 옷과 흰 머리와 구릿빛 피부의 뱀은 경멸마저 느낄 가치가 없다는 듯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음.
[왕자로, 영웅으로 찬미하며 무수한 적들 앞으로 내몰았으니 그들 모두의 목숨을 합한 것과 이 한 명의 목숨값이 같다는 의미겠지. 인사人事에 개입하여 살육을 저지르게 한 대가는 너희가 지키지 못한 너희의 왕자로 받아가겠다.]
쿠르릉, 거대한 뱀의 몸이 돌아서며 땅을 긁는 소리가 천둥 같았음.
-기, 기다려 주십시오!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이 아처를 붙잡았음. 아처는 고개만 돌려 성 쪽을 내려다보았음. 어머니뻘쯤 되는 중년 여인에게 붙들려 있던 아름다운 여인이, 붙잡은 손을 뿌리치고 성벽의 가장자리까지 다가와 아처를 향해 절규하듯 외쳤음.
-분명... 분명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이 땅의 책임이오나... 그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이로써 이 땅을 지켰습니다...염치불고하고 간청하건대, 위대한 뱀이여, 자비를 베푸시어 이 땅에서 그의 죽음을 기릴 수 있게라도 해 주십시오... 제발... 제발...
아름다운 얼굴을 눈물과 흙먼지로 더럽히고 성벽의 난간을 잡고서 떨리는 몸을 지탱하고 있던 여인의 몸이 풀썩 바닥으로 꺼졌음. 비통함과 두려움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자비를 구하려 몸을 낮춘 것이었음. 여인의 이름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음.
그대였는가. 그의 돌아갈 곳이. 모두가 그를 포기하려 할 때조차 그대만이 그를 붙잡는가.
말없이 여인-에메르를 내려다보던 아처가 품에 안은 쿠 훌린의 얼굴께로 손을 대는가 싶더니, 짤그랑, 하고 금속성의 무언가가 성벽 안쪽의 돌바닥 위를 굴렀음
[그것으로 그를 기리고 추도하라.]
여인은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한 쌍의 귀걸이를 주워 품에 안았고 아처는 통곡하는 소리를 뒤로 하며 다시 뱀의 모습으로 변했음.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붉은 뱀의 거대한 몸이 땅속으로 사라졌음.
**
울음을 들은 것 같아.
코는 피비린내와 쇠냄새로 진작 마비됐고. 하긴 둘이 다를 바도 없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살이 꿰뚫리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 비명. 절규. 말이 울부짖고 전차가 뒤집어지고 박살나는 소리. 이 모든 걸 삼키는 굉음. 이명 때문에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건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됐는지.
ㅡ나 왜 누워 있냐?!
-...!!!... !!...
기세 좋게 몸을 일으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온 몸에 끔찍한 격통이 일었음. 너무 아프면 소리도 안 난다고, 일어나다 만 자세 그대로 굳어 입만 벙긋거리고 있던 쿠 훌린은 뒤늦게 제 곁의 인기척을 알아챘음. 흠칫해서 몸을 물리자 2차 격통이 찾아왔음. 으그극...하는 소릴 내며 간신히 드러눕는데 그의 곁에 있던 인영이 중얼거렸음.
-이쪽 아버지는 연약하네.
-아, 아버ㅈ...?! 큭...
침상(푹신하고 이불이 있는 걸 보니 대충 그런 것 같았음) 곁에 앉아 있던 인영은 의외로 자그마하고, 왠지 누굴 생각나게 하는 붉은 옷으로 머리끝까지 휘감고 있었음. 목소리도 성별이 구분가지 않을 만큼 어렸고...근데 아버지?
-일어났군. 기껏 데려왔는데 죽어버리는가 했다.
이번에는 익숙한 목소리였음. 설마 싶었지만 잊을 수가 있는 말투랑 목소리여야지. 쿠 훌린은 시선을 돌렸음.
특유의 무표정을 한 아처가 작은 인영 옆, 쿠 훌린의 곁에 다가앉았음.
-보고 싶어 했으면서 너는 얼굴을 가리면 안 되지.
쿠 훌린에게 말할 때와는 딴판인 자상한 말투와 표정으로 아이를 타이른 아처는 아이가 쓴 후드를 벗겼음. 쏟아지는 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그을린 빛깔 얼굴이 드러났음.
내가 하려고 했는데, 하고 칭얼거리며 아처의 손을 피하는 얼굴이 앳되었음. 열 살도 안 되었을까, 찰랑이는 머리칼의 빛깔이 익숙해 쿠 훌린은 시선을 떼지 못했음. 그 시선을 느낀 아이가 홱 고개를 돌렸음. 마찬가지로 익숙한 은빛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쿠 훌린은 왠지 뜨끔하는 기분이었지만 시선을 피하면 지는 것 같아 그 눈을 마주하고 있었음.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아이였음. 그리고 아처의 등 뒤로 숨어서, 그 은빛 눈만 빼꼼 내놓고 있었음. 피부색이고 눈동자고 다 어떤 놈 판박이면서, 머리색은 또 날 닮았냐? 아처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저 아이는 자신이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쿠 훌린은 확신했음.
대신 다른 걸 묻기로 했음. 나는 왜 여기 있냐든가, 전쟁은 어찌 되었냐든가, 얼스터는? 코노트는?... 그 궁금증이 표정에서도 읽힌 듯 아처가 입을 열었음.
-이 아이가 너를 궁금해 해서 말이다. 너를 보러 갔을 뿐인데 그 땅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더군. 그래서...
-아버지가 보고 싶어 했어.
-아가?
우와, 저런 낯간지런 호칭을 잘도 부르네. 쿠 훌린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음. 아처가 드물게 당황했지만 아이는 아처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조잘거렸음.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했어.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가 봐야겠다고. 동굴 입구까지 갔다가도 이젠 상관없는 일이라며 돌아왔어. 몇 번이나 그랬어. 그래서 내가 가라고, 가자고 했어. 그래서 나는 아버지 입 속에 들어가고, 땅으로 이렇게 해서...
-아가.
조금 더 무거운 목소리에 아이는 입을 삐죽이며 조용해졌음. 민망해진 쿠 훌린이 괜히 핀잔을 주었음.
-야, 너는 애한테 무슨...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비친 아버지가 자식 교육에 말을 얹나?
맞는 말이라 쿠 훌린도 깨갱하며 조용해졌음. 그러나 이내 씩 웃고는 아이 쪽으로 눈길을 주며 말을 걸었음.
-아버지 참 무섭다, 그치.
아처 보란 듯 아처를 손가락질하며 눈을 흘기는 쿠 훌린의 모습에 아이가 웃음을 터뜨렸음. 그 무뚝뚝하고 피 차가운 놈의 자식답지 않게 환한 웃음을 마주하자 쿠 훌린 역시도 절로 웃음이 났음.
큼. 아처가 헛기침하는 소리에 꼬마는 뜨끔한 듯 표정을 가다듬어 처음 봤던 새치름한 무표정으로 돌아갔고 아처의 말이 이어졌음.
-...하여튼. 전쟁 중이었고 피아식별은 대강 가능했으니. 네 상대는 코노트였겠지.(이 대목에서 쿠 훌린이 끄덕였음) 그쪽을 정리하고 묶여 있는 널 거두어 왔다.
그곳에서 네가 말했던 이들을 보았지. 너의 왕도, 모친도, 그리고 너의 공주까지. 아처는 하려던 말을 갈무리하고 다른 말을 꺼냈음.
-코노트의 얼마 안 남은 잔존병력이 퇴각하는 것까지는 보았다. 이후 그 땅의 소식을 들은 적은 없으나 너희의 성뿐만 아니라 왕과 다른 병력들이 무사했으니 나라 또한 그렇겠지. 너 하나를 잃어 무너질 나라였다면 그뿐이고.
-이 새ㄲ...
순간 발끈했던 쿠 훌린이 화와 욕을 삼켰음. 여전히 아처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꼬마가 신경쓰였던 탓이었음. 그리고 어쨌거나, 그 뒤로 어찌 되었다 한들 이 자식이 얼스터와 자신을 구했던 것도 맞고.
-고맙다.
아처가 도리어 당황할 만큼의 명료한 진심이었음. 애써 냉정을 가장하며 아처가 대답했음.
-대가는 받아왔으니까.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혹은 그 '대가'가 무엇인지. 어떤 질문이든 남은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그에 쿠 훌린은 어떻게 반응할지, 그것이 아처를 긴장케 했음. 아처는 애써 미소지으며 곁의 아이를 돌아보았음
-잠시 저쪽에서 놀고 있겠니? 오랜만이니까 아버지들끼리 할 얘기가 있거든.
-나는 더 오랜만인데!
번역하자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다른 쪽 아버지란 뜻이었음. 쿠 훌린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음. 아이의 표정이 완고해 결국 아처는 아이를 어깨에 달고 말을 이었음.
-네 고국의 사람들은 네가 죽은 줄 안다. 내가 네 몸을 거두고 그쪽에 남긴 네 귀걸이로 대신 장례를 치르게 되었지.
-어, 진짜네?
쿠 훌린이 얼빠진 목소리로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음. 앞의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만드는 반응에 아처는 약간 맥이 빠졌음.
-..큼. 그래서...원한다면...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뭐야, 시체라서 가져왔는데 살아나서 볼일 없단 뜻이냐?
-아이 앞에서 대체 무슨 소리냐?!
아이가 불안한 눈으로 아처를 보았음. 그렇잖아도 '이쪽 아버지'는 방금 깨어났고, 얘기도 몇 마디 못했는데 돌아간다 어쩐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언성까지 높이니까.. 웃는 얼굴로 아이를 달래는 아처에게 쿠 훌린이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음.
-나 얼마만에 깬 거냐?
-응, 그럼. 화 난 것도 싸우는 것도 아니야. ...그곳에서 데려온 지 열흘만이다.
-목소리 바뀌는 거 봐라...됐어, 그럼. 장례 다 끝났겠네. 가면 더 혼란스러울 거야. 마지막 인사 같은 거야 뭐...전사가 언제부터 그러고 뒈... 죽었냐.
예상치 못한 반응에 아처는 어안이 벙벙했음. 저놈이 짓는 멍청한 얼굴이 우습고 맘에 들어 쿠 훌린이 킬킬거렸음.
-게다가 괴물 뱀이 지켜주는 나라로 소문이 났을 테니 얼스터도 한동안은 안전하겠지. 그렇다면 더더욱 나는 그 값을 치러야 하고.
-...'대가'라는 말에 스스로를 얽맬 필요는 없다.
아처는 또다시 쿠 훌린 본인의 의사에 반해 그를 곁에 두고 싶지는 않았음.
-그건 그저 너를 데려가기 위한 구실이었고...
-정신 드는 데 열흘씩이나 걸렸다니 다 죽어가는 걸 네녀석이 살린 거나 마찬가지겠지. 네가 살린 목숨이니 네 거다. 전투에서 진 자의 목숨이 승자의 것이듯.
-아버지가 살렸어.
'네 것'이라는 말이 심장에 주는 충격을 음미할 새도 없이, 어느새 아처의 품안에 자리를 잡고 있던 아이가 불쑥 입을 열었음. 아처가 난처한 얼굴로 아이를 타이르려 하자 쿠 훌린이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아이와 눈을 맞추었음.
-와, 진짜? 어떻게? 궁금하다!
-쿠 훌린...!
물론 부자 둘 다 아처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었음. 태양 같고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을까, 아이는 쿠 훌린의 눈을 바라보며 재잘거리기 시작했음.
-아버지의 나라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도 아버지는 아버지한테 기운을 줬어. 아버지의 기운이 아버지의 기운과 공명하면서 아버지는 죽지 않을 수 있었어. 나도 도왔어. 나는 아버지랑 아버지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
-...통역이 필요해 보이는 얼굴이군.
-...그러길래 자식아, 니가 처음부터 말했으면 좋았잖아.
-아이 앞에서 말을 삼가라. 그래, 아버지가 오래 자다 일어나서 목이 마를 테니 물을 좀 떠다 주겠니? 내 것도 네 것도 같이.
따로 놀고 있으라는 말은 안 들어도 이 말은 들었음. 아이가 비장한 얼굴로 잔을 찾아 떠나자(이 표정에서 아처가 보여서 쿠 훌린은 잠시 진저리쳤음) 아처가 길게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음.
-기운이 공명했다는 게 무슨 소리냐?
쿠 훌린의 질문이 정면으로 날아들었음. 그래. 이야기한다면 거기서부터겠지.
-네가 저 아이를 낳을 때를 기억하나?
-죽는 줄 알았지.
즉답이었음. 아처는 픽 웃으며 말을 이어갔음.
-그래, 나도 그랬다. 그래서 너를 살리기 위해 내 영력 일부를 모아 먹였지. 아이가 말한 건 네 안에 있는 것과 내 영력이 공명했다는 뜻이다. 너와 가까이 있을수록 네게 준 영력과 내가 가진 것이 파동처럼 서로 겹치면서 더욱 커지고 강해져 네 회복을 돕게 되지.
-뭐...!
-고국에 있는 네가 위험한 상황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그럼 혹시 쟤 낳고 네놈이랑 대련할 때 드럽게 안 맞던 것도 그것 땜에...?
-이해가 빠르군. 그렇다고 해서 독심술 수준으로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알아챌 정도는 되지 못하니 안심해라. 너는 아까 네 목숨을 내 것이라 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네 목숨은 나와 이어져 너만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내가 죽는다고 네가 죽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라. 다만...
-다만?
-......
-아, 뭔데! 주둥이 잘 놀리던 놈이 답잖게 입을 딱 붙이고 있어?!
-...차라리...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 싶을 정도의 비통함과 공허감이 찾아들지. 그뿐이다.
재촉 끝에 꺼내기 무거운 말이 나왔음. 그렇다는 건 제게 오기 전까지, 제가 죽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애 앞에서 죽네 사네 청승을 떨었다는 얘기겠지.
-그뿐같은 소리 하네. 으그악...
아처의 등짝을 한 대 쳐줄 셈으로 침상에서 일어나던 쿠 훌린이 죽는소리를 내며 주저앉았음. 아처가 기겁해 날듯이 다가왔음(뱀 하반신의 탄력을 이용해 용수철처럼 몸을 날리기 때문에 아주 틀린 말도 아니거니와)
-누워 있어라. 아직 좀 더 회복이...
-회복?
물 세 잔을 쟁반에 담아 들고 오던 아이가 반색하며 다가왔음
-아니, 아가. 지금은 그게 아니라...
-연약한 쪽 아버지가 또 아파 보이는데?
용케도 여기까지 물 한 방울 안 흘리고(꼼꼼하고 솜씨 좋은 점도 놈을 닮은 것 같다고 쿠 훌린은 생각했음) 온 아이는 쟁반을 내려놓고 두 아버지들을 향해 팔을 벌리며 다가왔음. 자신이 도왔다는 말은 이 의미였음. 아처와 쿠 훌린의 피를 모두 받은 아이의 기운도 제 아버지들의 기운과 공명했으니까. 통증으로 몸을 못 가누는 쿠 훌린과 그를 제 품에 기대게 해 서서히 침대로 앉히는 아처의 모습, 그렇게 한참을 지키듯 품에 안고 앉아 있던 모습이 아이가 기억하는 '치료'였음.
-아버지를 씻기고 약 바르고 싸맨 다음에는 매일 이러고 잤어.
두 아버지들 사이에 파고든 아이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음. 아무리 말을 잘하고 손재주가 야무져도 어린애라 금세 잠이 들었음. 얼결에 한 침상에 셋이 바짝 붙어 누운 상황에서 쿠 훌린이 아이의 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었음.
-이 녀석 몇 살인데 이렇게 커?
-아이를 언제 낳았는지도 잊었나? 무심하기도 하지. 아이가 들을까 무섭군.(이 대목에서 아처는 잠든 아이의 귀를 손으로 덮었음) 혈통이 혈통이다 보니 성장이 빠르다.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아이도 너를 구하는 것을 도왔고. 돌에 묶인 너를 풀어 데려왔지.
-...얘가 날 들었다고...?
-혈통이 비범하다지 않았나.
그리고 다시 침묵.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쿠 훌린이었음. 가벼운 어조에 웃는 얼굴이었지만 말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음.
-두 번을 빚진 목숨이다. 대가 노릇은 톡톡히 해 주지.
-새로운 종류의 선전포고인가? 누누이 말하지만 빚이나 대가로 여길 필요는 없다. 내 아이를 낳다 죽을 뻔했으니 내가 살렸고 내 아이가 보고 싶어 하니 구했을 뿐. 너는 원하는 대로 하면 돼.
-말귀 못 알아듣는 새끼.(이 대목에서 쿠 훌린의 손도 아이의 귀를 덮었음) 네가 말을 꼬니까 남의 말도 꼬아서 듣는 거 아냐. 있어 주겠단 소릴 못 알아듣겠어? 마침 그...갈 곳도 없어지고! 거, 피차 슬퍼 죽을 일은 없게 하자고. 엉?
침대는 좁고 얼굴은 가까워서 서로의 벌게진 얼굴을 숨길 곳이 없었음. 괜스레 아이의 푸르고 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손장난치던 쿠 훌린이 퍼뜩 생각났다는 듯 물었음.
-...그...건 그렇고, 얜 이름이 뭐냐? 부를 게 없으니까 영 불편하네. 자주 부를 텐데.
고개를 들어 바라본 아처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해 있었음. 어딘지 쑥스러워 하는 듯한 모습으로 아처가 답했음.
-그 부분이야말로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이름은 양친이 함께 짓는 것이 좋을 듯하여 아직 이름을 짓지 않았다. 함께 고민해 보겠나?
-完
'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궁창] 뱀수인 아처x인간 랜서 썰 - 2 (0) | 2019.07.21 |
---|---|
[궁창] 뱀수인 아처x인간 랜서 썰 - 1 (0) | 2019.07.18 |
[영궁캐쿠] ㅋㅌㅂㅇ 캐쿠 (0) | 2018.08.29 |
[영궁캐쿠] 끝, 조금씩 확실히 (0) | 2018.07.23 |
[궁창] 인어 아처x인간 랜서 썰 (0) | 2018.06.24 |